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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인
신동준 권은하 방성인
작 인
신동준 권은하 방성인
기차의 목적지
방성인
커버가 뜯어져 속이 드러난 좌석, 흩날리는, 누렇게 바랜 커튼, 금 간 유리창, 쏟아지는 눈. 빠르게 지나가는
회색 구름들, 검은 나무들, 눈에 반쯤 가려진 빨간 표지판들.
텅 빈 기차에 홀로 앉아
손에 입김을 불며 나는
기차에는 목적지가 있고, 나는 분명 그곳에 가기 위해 여기에 올라탄 것일 텐데.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떠오르는 건
나를 싣고 기차가 건넜던
검은 강뿐이었다. 아무도 빠져나오지 못할 것만 같이 깊고 넓은 강. 닿기만 해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남길 듯한, 검은 잉크 같은 강.
어쩌면 나는 뭔가 끈덕진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중일 지도 몰라. 어쩌면 나는 속죄하는 중일 지도 몰라.
텅 빈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고
주머니의 구멍으로 부는 찬 바람 속에서
주먹을 꼭 쥐고
다른 칸에는 누군가 있을 거야
나는 기차의 좁고 긴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도대체 나의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답을 얻기 위해.
*
기차는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빈칸 하나, 하나를 지나며 여러 번 넘어지고 일어섰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전등은 서서히 어두워졌다. 부서진 좌석들이 많아졌다. 깨진 유리창이 잦아졌다. 바람은 더욱 거세게 들이쳤다. 찢어진 커튼 조각들과 눈이 마구 휘날렸다.
마침내
전등이 완전히 꺼졌다. 어느새 창밖으로는
달도 별도 뜨지 않은, 검은 강물 같은 어둠.
나는 넘어졌다.
뭔가를 손으로 디뎌보려 했지만 잡히는 것은 없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돌려도 보이는 건 어둠뿐.
누구 있나요? 여기가 어딘가요? 저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나는 고개를 바닥에 박은 채
마구 소리쳤다.
내지른 소리들은 몇 겹의 메아리로 울렸다. 메아리의 음계는 벽에서 벽으로 진동하며 점차 옅어졌다. 높아졌다.
높아지고, 높아지고
문득
히히히
누군가의 높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작고 하얀 불빛이 저 멀리서 동그랗게 점멸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불빛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칸에서 새어 나온 것이라 짐작했다. 나는 내 시선을 불빛에 고정한 채 기어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리 기어도 제자리인 것 같았다.
불빛에 가까이 다가섰을 때 나는
불빛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각자 빛을 내는 그것들은 주먹만 한 크기로, 저 멀리까지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빛 무리는 내가 기어가는 것보다 더 빠르게
나에게 다가오면서 모두 웃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점차 커졌다. 히히히. 나는 불빛들에 에워 싸였다. 히히히, 나는 그것들에게 손을 조심히 가져다 댔고, 그것들은 빠르게 손아귀를 피해 날아다녔다. 히히히.
나는 울먹이며 물었다. 여긴 어디입니까? 히히히, 저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히히히, 저는 누구입니까? 히히히,
너무나 큰 웃음소리에 내 울먹임은 가려졌다.
아무리 소리를 내질러도 웃음소리만 들렸다. 마치
내 몸이 웃음소리로 가득 찬 것만 같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아도 불빛들이 보였다.
세찬 바람에 나는 둥실 떠올랐다.
손에 닿는 건 먼지만큼 작은 커튼 조각들 뿐이었다.
기차가 멈춘 것만 같았다.
내 감은 시야가 온통 흰빛으로
물들었다. 흰빛. 흰빛에서… 흰빛.
*
기차의 목적지에서 이어지는 듯한 기차가 기다려요
방성인
*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쿡쿡 찌르는 느낌에 남자는 눈을 떴다. 흰빛, 눈에 덮인 갈대밭이었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리에 비해 커다란 군밤 모자를 쓰고, 몸에 비해 커다란 배낭을 멘 아이가 나뭇가지로 눈밭 이곳저곳을 찌르고 있었다.
아이는 돌멩이를 주워 배낭에 넣기도, 던지기도 하고, 손바닥에 꼭 쥐고 유심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남자는 아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남자가 이곳이 어디인지, 아이는 누구인지 물어보기 위해 입을 뗀 순간,
그 순간
히히히 아이가 웃었다.
아이 뒤로 검은 강은 흐르고, 안개는 짙고, 멀리서 기차 기적소리는 들리고
아이는
기차가 기다려요.
말하고는 웃었다.
남자는 천천히 일어나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더 크게 웃으며 술래잡기하듯,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는 배낭을 메고서도 남자보다 훨씬 재빨랐다.
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희미해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따라 안갯속으로 함께 내달렸다.
*
한참이 지나, 남자는 숨을 고르기 위해 주저앉았다. 강한 바람이 불었다. 짙은 안개가 한순간 걷혔다. 남자의 바로 앞으로 검은 강이 펼쳐졌다. 검은 강 위에는 얇게 얼음이 서려 있었다.
이렇게 검은 강에는 부러진 나뭇가지와 죽은 생선들만 가득할 것 같다고, 발을 담그면 휙 끌려갈 것만 같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히히히
어디선가 다시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 아이가
검은 강 위를
뛰어 너머로 가고 있었다.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남자 뒤로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꺼운 외투로 몸을 가리고 목도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노인이 서 있었다.
여행, 여행 중입니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여기엔 별로 볼만한 게 없을 텐데… 노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남자가 바라보던 검은 강을 바라보았다.
다시 피어난 안개에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이의 웃음소리는 아직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노인은 혀를 차며 말했다. 저 아이는 정신이 나갔어요. 커다란 눈사태에
하얀 눈에 구두장이 지 아비와 함께 묻혔을 때부터, 홀로 눈 속에서 끄집어졌을 때부터 웃기만 했어요. 구두도 다 내던져 버리고, 어휴, 막 뜀박질을…
노인의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아이의 과거를 상상했다.
낮은 천장의 오두막에 쪼그려 앉아 있는 아이. 피어놓은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보는 아이. 아이 옆에서 무두질하는 아비. 아비는 아이에게 자신을 따라 장인이 돼라 말했을까. 빨리 집중하라 했을까.
… 그래서 제가 지금 이 몽둥이도 들고 외곽까지 순찰 나온 겁니다. 남자가 딴생각에 몰두하는 와중에 노인이 말을 끝맺었다. 노인은 이제 뭔가 대답을 바라는 듯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노인을 마주 보았다. 잠시 동안의 침묵.
수상하다니까, 정확히 당신 누구냐고. 당신이 그 좀도둑 아니야? 노인이 소리쳤다.
번쩍, 흰빛이 시야를 강타했다.
*
남자는 이마에서 눈가로 흐르는 피를 연신 닦아대며, 다시 안갯속을 내달렸다. 뒤로는 노인의 외침이 들렸다.
어디 가! 누구야 너! 우리 마을엔 이럴 새끼가 없어! 이 거지, 식충이 새끼! 빨리 네가 누군지 말해!
노인의 외침은 오래 따라붙지 못했다. 남자는 잠시 멈춰 서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도 모르는 내가 누구라고? 내가 어디서 왔다고?
실소를 터뜨렸다.
바람이 다시 거세게 불었고
안갯속에서 기차 플랫폼이 드러났다.
그곳엔 아이가 홀로 서 있었다. 아이는 떨어지는 눈송이를 혀로 받으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남자는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싱긋 웃어 보였다. 아이는 다시 웃었다. 갑자기
모든 소리를 지우는 기적소리가 플랫폼을 가득 메웠다.
철도의 끝에서 두 불빛이 안개를 뚫고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의 두 눈이 빛을 반사하며 살짝 빛났다. 아이가 잠시 입을 뻐끔거렸다.
남자는 아이의 입술을 따라 뻐끔거려보았다.
다시, 기차가 기다려요. 라 말한 것 같았다.
온 시야에 들이치는 흰빛 속에서
아이가 웃었다.
복숭아
신동준
풀벌레는 소리를 낸다.
풀벌레는 낮은 자세로
풀벌레는 교신한다.
이웃은 내 땅이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말하고 다닌다.
이웃이 이웃에게 계속해 전달함으로써
이웃은 이웃들이 된다.
이사를 왔으니
떡부터 돌려야겠어.
그건 내가 할 일이다.
초인종을 누르면
초인종이 울리고
철문은 소리를 적당량 감춘다.
그것은 철문이 할 일이다.
익충과 해충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농사 교육 센터에서는 강사의 지시에 따라
각기 다른 종의 풀벌레 모형들이
그러데이션처럼 놓여 있다.
풀벌레는 교섭하고
풀벌레는 운다.
풀벌레는 고른 음량을 유지하며
풀벌레는 움직이지 않는다.
풀벌레는 기다린다.
그것은 풀벌레들이 할 일이다.
겹겹이 쌓인 유리창으로도
빛은 투과되고
자라났다가 그치길 반복하면서
빛은 누적된다
다만
마당으로 나와 흐르는 땀을 닦으며
복숭아나무를 가꾸는 일
건너편의 이웃은 빨래를 털며
맛이 참 좋겠다고 얘기한다.
아직은 묘목입니다.
마을에는
해가 떠 있는 동안 지쳐 잠든 사람도 있으며
해가 지도록 오지 않는 사람도 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나는 할 일을 마저 한다.
여름의 소음은 좀처럼 끊이지 않았고
다음 저어새
신동준
저어새 하나가 걷고, 다음 저어새 하나가 그 위를 날고, 다음 저어새 하나가 비행 대열에 합류하는 걸 바라보면서
나는 저어새가 될 것 같다. 가늘어진 다리가 갯벌을 푹푹 찌를 것 같다.
저어새가 물고기 하나를 물고, 다음 저어새가 수생곤충 하나를 물고, 다음 저어새가 둥지 속에서 어미가 물어올 먹이를 기다릴 동안
부리를 열면 무언가 왈칵 쏟아질 것 같다. 아무래도 그것들은 나를 간추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어제의 저어새가 어제에 홀연히 놓여있고, 내일의 저어새가 내일에 오도카니 앉아있다. 내게도 날개가 있다면
나는 시간 위를 걸어본다. 저어새의 가벼운 걸음으로. 총총거리며. 그렇다면 시간은 구부러진다, 계절은 흐트러진다. 저어새 무리는 남쪽으로 날아가고, 북쪽으로 날아가고.
나는 최초의 저어새가 되어가는구나.
날개를 흔들고 부리를 저어보았다. 저어새의 위치가 넓어져 갔다.
다음 저어새 하나가 그 위를 걷는다. 다음 저어새 하나가 그 위를 난다. 다음 저어새 하나와, 다음 저어새 하나와, 다음 저어새 하나와
나는 비행 대열에 합류한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구름 속을 지나면서, 쏟아지는 바람을 비껴가면서, 저어새가 저어새로부터 희박해지면서, 대열이 해체되어가고 있구나. 우리는 폭풍으로 들어간다. 먼저 온 우리의 동료들이 이미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두오
권은하
이것은 단지 식물원의 입구에서 두오를 기다리는 일이다. 언제 왔냐며 나를 금세 찾아내는 두오를. 나는 두오와 함께 식물원에 처음 갔었다고 기억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두오는 식물원 밖을 나온 적이 없다. 내가 그곳에서 두오를 만났을 뿐이다.
두오는 내 손을 잡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들어가지 마시오라고 쓰인 표목을 겅중 뛰어넘고 나무와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기는 법을 가르쳐준다. 문을 하나 열면 야생 식물들이 있고 다음 문을 열면 열대 식물들이 있고. 이런 건 좀 이상하지 않아. 두오한테 물으면 두오는 고개를 끄덕일 뿐 별말이 없다. 하지만 이곳에는…… 새가 있어. 뒤늦게 두오가 대답한다.
두오가 말하는 새:
그 새는 아주 아름다운 색을 갖고 있어. 어떤 날에는 은행나무 색처럼 보였다가 다른 날에는 야자수 색처럼 보여. 하지만 그 새의 깃털은 언제나 세상의 온갖 빛을 머금은 것처럼 윤기가 나. 새에게는 뾰족한 날개가 있어서 눈을 마주치면 빠르게 날아가 버려.
나는 식물원에서 새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다만 식물과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곧은 두오의 등을 떠올릴 수는 있다. 그다음 두오의 눈에 맺힌 새를 상상할 수는 있다. 그 새는 아주 아름다운 색을 갖고 있다. 그 새의 깃털은 세상의 온갖 빛을 머금은 것처럼 윤기가 난다.
그러나 나는 그 새를 믿을 수 없기에
식물원의 문을 열고 두오를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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