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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나현 박준하 채윤 윤채연

    Ⅵ. THE LOVERS

    박나현

     

     

    두 명이 딱 붙어야만 겨우 앉을 수 있는 의자. 간헐적으로 네 움직임이 느껴지고, 나는 그때마다 벽에 더욱 달라붙었지. 앞으로는 오십 센티보다 살짝 먼 타로 리더와의 거리. 분명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온 곳인데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빠져나가고 싶었어.

     

    우린 오랜만에 만났지만 크게 나눌 이야기는 없었어. 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는 핫초코. 카페에선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왔어. 넌 시선을 창밖에 두었고 나도 너를 따라 창밖을 슬쩍 봤지. 각양각색으로 크리스마스를 꾸민 가게들과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뭐 볼 게 있나… 하다 창에 비친 네 얼굴을 봤지.

     

    아유, 추운 날에 기다리느라 힘들었죠? 보자 보자. 커플인 거 같은데 뭐 봐 드릴까, 둘이 같이 보는 애정운?

    넌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도 그랬지. 타로 리더는 카드를 섞더니 천 위에 펼쳐놓았어. 자, 남자분 먼저 3개 뽑고, 그다음 여자분이 3개 뽑으세요. 넌 망설이지도 않고 카드 3개를 뽑았지. 다음은 내 차례. 난 손을 허공에 두고 이리저리 움직였어. 타로 리더는 여자분이 많이 신중하시네, 하며 웃었지. 겨우 카드를 3개 뽑았고 타로 리더는 곧바로 카드들을 펼쳤어.

     

    곧 새해니까 우리 타로 보러 가자.

    나는 창밖을 보지 않은 척 눈동자를 네게 돌렸어. 넌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지. 응, 그래. 그게 낫겠다. 내 대답에 넌 바로 일어나서 뒷정리를 했어. 한 입도 마시지 않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그대로 다 버렸지. 난 급하게 핫초코를 마시다가 혓바닥을 데었는데.

     

    그럴 줄 알았다. 둘 다 소심해서 서로 표현을 못 하네요? 고민하지 말고 연락해요. 각자 카드 뽑은 거 보니까 완전 사랑하는 사이구만. 뭐, 크게 조심해야 할 건 안 나왔고. 둘이 앞으로의 애정운은 어떤지 봅시다.

     

    타로 리더는 카드 더미에서 아무런 카드 한 장을 뽑아냈고 우리가 뽑은 카드 사이에 놓았어. 카드는 Ⅵ. THE LOVERS. 둘은 천생연분이네. 카드들이 이렇게 나오면… 나는 뚫어져라 연인 카드를 쳐다봤어. 두 사람 사이에 있는 한 천사. 두 사람은 무표정이고 천사는 눈을 감고 있고. THE LOVERS라는 말만 빠지면 연인이라는 걸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지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어.

    오로라 빌리지

    박나현

     

     

    저기 봐, 달이 두 개야.

     

    아마도 새벽 세 시쯤. 오로라 티피에서 나와 네가 가장 먼저 한 말은 달이 두 개라는 거였어. 내 눈에는 달의 형상조차 보이지 않았는데. 그저 구름 하나 없이 어두운 회흑색 밤하늘. 오로라로 칭할 만한 것도 없었고, 네가 본 게 설령 오로라였어도 달이랑은 너무 다르지 않나? 너는 고개를 들고 하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지.

     

    그믐달 두 개 안 보여? 위아래로 두 개가 살짝 겹쳐진 채 보이잖아.

     

    네 시선을 따라가도 달이 보이진 않아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어. 사람들은 오늘도 글렀다며 다시 오로라 티피로 돌아가고 있는데 우리만 그대로 서 있었지. 너는 밤하늘을 온전히 눈에 담아가려는 듯 눈을 한 번도 감지 않고 하늘을 바라봤고, 나는 그런 네 눈을 지켜봤어. 너는 틀렸던 적이 없었으니까 네 눈동자 안에는 혹시 답이 있을까 싶어서.

     

    몇 분을 가만히 있었을까. 영하 40도의 기온에 머리가 점점 아파져 오고 입까지 올려 쓴 목도리에는 서리가 생기기 시작해. 너는 간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믐달 두 개가 보이냐고 내게 물어봐. 설마 내가 달을 봤다고 할 때까지 안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네 시선이 정확히 꽂힌 하늘에 네가 말한 그믐달 두 개를 머릿속으로 그려봤어. 그믐달은 왼쪽이 파였는지, 오른쪽이 파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지. 얼버무리면서 네게 말했어. 저거 맞지?

     

    이제 보여?

    응, 보인다. 연노란색 맞지. 달이 되게 흐릿하다.

    그것보단 연회색에 가깝지 않나? 뭐… 연노란색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투 두 리스트

    박나현

     

     

    선풍기 괴담

    을 믿은 건 아니었지만

    한겨울에 창문을 꼭 닫고

    선풍기를 강에 맞춰

     

    방 한가득 백합

    기모바지에 패딩을 껴입고 방 한 가운데에 누워

    정말 잠이 많이 오면 주변이

    어떻든 잘 자는 게 사람이야,

    누가 했는지 모를 말을 믿고

    알약 여러 개를 입 안에 털어 넣어

     

    잠이 오는 와중에도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는 못해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지만

    기분이 나아졌으면 됐지, 뭐

     

    죽기 전만 검색창에 쳐도

    자동완성검색어가 나와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탑 50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탑 100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명소 탑 50

     

    아큐정전 라이언 일병 구하기 융프라우

     

    머릿속에는

    처음 보는 아큐가

    스위스의 한 전쟁터 속 뛰어다녀

     

    내일 아침에 입이 돌아간 채로

    안녕 인사를 건네도 절대…

    .

    체험 학습

    박준하

     

    대관령 목장의 소들은

    목놓아 울지 않는다

    한나절 산보하며 익힌 지형을

    수풀 사이사이에 숨겨놓는다

     

    ……덩치 큰 아저씨들이 우리더러 잘 보라고 손짓했어 여기, 태초에 관한 보고서 출산이 임박한 암소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는데, 떨다가 이내 지쳐서 풀썩 내려앉았다 그 모습이 꼭 실신한 마라톤 선수 같아 크크, 웃는 애들도 있었지 태반을 걷어차고 나온 앞다리 한 쌍 달리고, 달리겠다는 암소의 의지였다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지만 나도 암소와 함께 거닐었던 초원의 푸른 향기를 되새겼어 송아지 분만 시에는 산파의 손길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화면에 아저씨들과 똑 닮은 사람들이 나타나고, 그들도 암소가 낳은 새끼들일지 몰라 하나가 암소를 단단히 고정하자 다른 하나는 새끼의 두 다리를 낚아채 순간 잡아당겼다 피와 분비물로 축축해진 풀뿌리, 풀뿌리를 핥으려는 것인지 새끼를 핥으려는 것인지 암소는 연신 혀만 내밀었어 동공이 멍해 내 눈과 비슷했다 동동 흰자위에 떠오른 죽은 눈동자, 나를 노려보고 있어 저 아래서부터 벌레들이 들끓어 올라 금방이라도 내장을 파먹을 듯해 나는 엄마 뱃속으로 기어가 꽁꽁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린 신선한 우유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먹었다

    실낙원

    박준하

     

     

    지네가 기어다니는 상상을 한다

    눌러쓴 글자들이 일어나

    흰 종이를 갉아 먹는다

    바삐 내달리는 온점들

    절뚝이는 문장은 피동이 되었지

    선생님께서는 나의 나쁜 문장 습관을 지적하셨는데,

    나는 그 문장들이 나빠서 마음이 놓였다

    오직 아픈 사람만 글을 쓴다는 이야기

    제자리를 잃은 단어들이

    혀를 빼물고 서로 뒤엉킨다

    단단한 고리가 손목에까지 옮겨붙으며

    모세혈관처럼 푸르게 부식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나는 썩어가는 몸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시체를

    야금야금 떼먹으며 성장했듯이

    나 또한 잡아먹힐 채비를 한다

    점점 더 내밀하게 파고드는 발톱,

    몸통 마디마디마다

    독이 고인다

    살이 허문다

    그 옛날 밀랍에 갇힌 사람의 모양을 본떴다는

    상형문자의 꼴로 돌아간다

    희미한 스탠드 불빛이

    발화(發火)된 문장이 남긴

    잿더미를 비추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박준하

     

     

    그림자인 당신과 그림자인 내가 그림자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다 식탁 위에는 그날그날의 그림자 식단이 놓여 있고, 당신 쪽에서 날아온 그림자 미트볼을 기점으로 작은 전쟁이 발발하였다 도발을 주도했던 당신의 그림자 포크는 미트볼을 찍으려다가 단순히 실수했을 뿐이라고 긴급 성명을 발표했지만 친애하는 나의 그림자 숟가락은 미트볼의 괄목할 만한 고도와 비거리를 감안했을 때, 정밀한 미분 계산을 거친 후 계획적으로 찍은 게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삼지창 닮은 놈은 믿을 만한 게 못 된다며 콧방귀를 뀌었는데 자신을 불경한 삼지창에 빗댄 것에 대해 제대로 성이 난 포크는 그래, 이 삼지창이 네 머리를 아주 납작하게 만들어 주마 하늘에 산성비 같은 그림자 파르메산을 흩뿌리고, 그것이 땅에 내려앉기도 전에 기다란 그림자 파스타 면을 넘실넘실 범람시켰다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될수록 무고한 그림자 식기들은 군데군데 박인 녹을 호소하며 힘없이 쓰러져 갔다 어느 날은 그 시체 더미 위에 당신이 쓰러진다 당신은 야윈 그림자였다 단지 식사를 하고 싶었던 우리였는데, 전쟁은 영영 끝나지 않았다 닳고 닳아 포크가 숟가락이 되고 숟가락이 포크가 될 때까지 얼굴 없는 유령들이 식탁 위를 배회했다 그들의 들리지 않는 곡소리가 나를 구속시켰다 누군가 멀리서 우리를 훔쳐본다면 기형의 시체가 몸져누운 엉성한 관쯤으로 보이겠지 너나 나나 그림자일 뿐이니까, 그림자는 평등하게 죽어 갔다

    계절이 머무는 곳

    채윤

     

     

    새하얀 모래뿐이었다. 사람도, 짐승도 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저 멀리 소녀 하나가 이곳을 걸어오고 있었다. 길게 늘어선 발자국은 성인의 것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걷는 내내 소녀는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 모래 위로 내리쬐는 햇빛이 자꾸 소녀의 눈을 찔렀다. 끝은 아직 너무나도 멀었다. 소녀가 태어난 곳, 푸른 물이 흐르는 강, 그리고 집. 소녀가 찾는 사람은 원천강에 살고 있다고 했다. 원천강에 대해서 소녀가 아는 것은, 이곳에 사는 누군가가 그곳으로 가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소녀는 한참을 더 걸었다. 저 멀리 집 한 채가 보였다. 적당히 크고, 화려하고, 잘 꾸며진 집이었다. 소녀는 천천히 집을 향해 걸었다. 이 땅에서 소녀가 찾던 사람은 분명 저곳에 있었다. 멈추지 않고 걸어서 소녀는 마침내 문 앞까지 도착했다. 소녀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안에서 남자가 소리쳤다. 다소 신경질적이면서도 놀라움이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안경을 쓴 젊은 남자가 나와 소녀를 맞이했다. 그는 소녀가 찾던, 원천강으로 가는 방법을 안다는 사람이었다. 남자는 다소 놀란 투로 소녀를 집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지친 소녀를 눕히고 쉬게 했다. 소녀는 금세 잠들었다. 여행의 피로가 한꺼번에 소녀를 덮쳤다.

    소녀가 일어났을 땐 밤이었다. 남자는 소녀가 며칠 밤낮을 자기만 했다고 말했다. 소녀는 자신이 원천강으로 가기 위해 여기 왔으며, 고향으로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다기에 찾아왔다고, 남자에게 무작정 말들을 쏟아냈다.

    남자는 이 사막을 지나면 노란 모래의 사막이 나온다고, 그곳 연못에 사는 연꽃을 찾아가라고 말했다. 그 이상은 자신도 모른다고도 말했다. 소녀는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며칠이나 잤어도 여전히 다리가 아팠다. 남자는 소녀에게, 원하는 만큼 쉬고 가도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 소녀가 고향에 돌아가게 된다면, 자신이 언제까지 이 사막에서 독서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물어봐 달라고 부탁했다. 소녀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했다.

    남자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소녀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왠지 모를 쓸쓸함을 느꼈다.

    *

    차들이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메이린은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잘 포장된 도로와 높다란 건물들이 신기해서, 혹은 넓으면서도 쓰레기가 거의 없는 인도가 세련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보기 드문 풍경이기는 했다. 그녀가 태어났던 중국은 이보다 훨씬 더 불편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가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어머니처럼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몇 분 전, 국정원 사람들이 중국에서 밀항해 들어온 메이린을 이곳으로 데려왔었다. 그들은 한국말로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그러나 메이린은 한국말을 할 줄 몰랐다. 단지 그들의 표정과 손에 들고 있는 종이 따위를 보면서 무언가를 물어보고 있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대화에 진척이 없자 그들은 통역사를 불렀다. 통역사는 메이린에게,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됐는지, 북한에 대해 아는 게 없는지 물어보았다. 메이린은 그제야 자신이 누구며 어쩌다 여기로 왔는지 간략하게 설명했다. 통역사는 그것을 공무원들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안하지만 지원금을 줄 수도, 보호시설로 인도해 줄 수도 없다는 말과 함께 메이린을 밖으로 쫓아냈다. 그렇게 메이린은 빈손으로 쫓겨났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시간조차 없었다.

    메이린은 쪼그려 앉았다. 계획도, 뾰족한 방법도 없었다. 가지고 있는 것도 없었다. 앉아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앉아서 기다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졸음이 몰려왔다. 메이린은 잠시 잠들었다. 아무리 중국을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여행의 긴장은 피할 수 없었다.

    한참 뒤, 누군가가 메이린을 깨웠다. 한 소년이 메이린을 깨우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 소년이 메이린에게 한국말로 무어라 말하기 시작했다. 메이린은 지쳤다는 듯이 말했다. 평소대로의, 유창한 중국어였다.

    “난 갈 곳이 없어.”

    소년과 소년의 어머니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서로 한국어로 무언가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서 무언가를 입력한 다음 메이린에게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소년이 메이린에게 휴대폰을 건네주며 화면의 자판을 가리켰다. 메이린은 지금껏 직접 자판을 만져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쓰는 모습을 본 것이 고작이었다. 메이린은 조심스레, 천천히 자판에 병음을 입력했다. 화면에 출력된 병음이 간체자로 바뀌고, 간체자는 아래쪽에 생소한 언어로 번역됐다. 메이린은 최대한 간략하게 배를 타고 한국에 온 일, 국정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적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다시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소년과 그 어머니는 한국말로 다시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대체로 알겠다는 듯 보였지만 뭔가 의아해 하는 것도 같았다. 소년과 어머니가 휴대폰에 다시 글자를 입력해서 메이린에게 보여줬다. 이번엔 화면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하나원으로 가보세요.’

    하나원? 하나원이 뭐지? 메이린은 소년에게 하나원에 해당하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소년은 다시 휴대전화에 무언가를 입력해서 메이린에게 보여줬다. 이번에 화면에 나타나 있는 것은 약도였다. 아마 하나원이라는 곳으로 가는 방법인 모양이었다. 소년은 다시 휴대전화에 무언가를 입력해서 메이린에게 보여줬다.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요.’

    소년의 어머니가 무언가를 꺼내 메이린에게 내밀었다. 생소했지만, 메이린은 그것이 지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메이린은 지폐를 받고, 소년의 어머니 편으로 고개를 숙였다. 소년과 소년의 어머니는 메이린을 지하철역 근처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가볍게 인사를 하고선, 서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며 시야 너머로 사라졌다.

    메이린은 마지막까지 그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주머니에 들어있는 지폐와 하나원으로 가는 길을 적어놓은 메모를 떠올렸다. 하나원. 그들은 하나원이라는 곳에 메이린과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했다. 메이린은 주위를 둘러보며, 하나원으로 가는 길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메이린에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그 하나원까지 가는 수밖에 없었다.

    *

    지하철에는 그래도 중국어가 쓰여 있었다. 메모에 적혀있는 한국어도 꾹꾹 눌러 써준 덕분에 어떻게든 모양을 비교할 순 있었다. 메이린은 천천히 중국어를 찾아가면서 표를 끊었고, 지하철에 탔다.

    중국어 안내 덕분에 역을 놓치는 일은 없었다. 메이린은, 지하철에 탄 사람들을 보면서, 한국 사람들도 생각보다 아주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는 어디에 있을지, 언제쯤 만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내려야 할 곳이 가까워졌다. 메이린은 알려준 역에서 내렸다. 메이린은 역에 내린 채로 글자 모양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지나치게 틀린 모형은… 없었다.

    메이린은 역 바깥으로 나왔다. 지하철 자체는 중국에서도 본 적이 있어서 꽤 익숙한 편이었다. 타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아예 모르는 것들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문제는, 이제부턴 걸어서 하나원까지 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메이린은 서울의 지리를 몰랐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메모장을 보여주면…알까?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는 수밖에 없었다. 메이린은 엄마가 한국에 왔을 때, 꼭 엄마에게 이 길을 안내해 주리라 다짐했다. 밖으로 나가는 문을 찾아 역사를 벗어나서, 무작정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그 꾹꾹 눌러 쓴 메모장을 보여주면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계속 물었다.

    지하철로 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예 다른 곳을 가리키는 사람도 있었다. 메이린은 한참 동안 지하철 근처를 떠돌았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다. 메이린도 점점 지쳐갔다. 가르쳐 주는 대로 전부 걸어가다 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메이린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확실하지 않더라도, 익숙한 단어가 들리지 않더라도 무작정 걸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메이린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봤다. 마침내, 누군가가 메이린에게도 익숙한 단어를 말하며 저기 어딘가를 가리켰다. 하나원. 분명 그는 하나원이라고 말했다. 메이린은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고 곧바로 그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그런 건 전혀 몰랐다. 그저 하염없이 가르쳐 준 방향대로 걸었다.

    어느 정도 걷자, 건물 하나가 나왔다. 메이린은 그것이 하나원임을 직감했다. 메이린은 곧장 하나원 건물로 들어섰다. 아직 건물에는 전등불이 켜져 있었다. 적어도 누군가는 그 안에 있었다.

    건물 안의 사람들이 당황한 듯 메이린을 쳐다보았다. 메이린은 중국어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메모장을 보여주며, 누군가가 길을 알려줬다고, 사람들에게 물어가면서 겨우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서로 눈치를 보면서 무어라 말을 주고받았다. 메이린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때 방에서 소년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비교적 어눌해 보이는 한국말로 사람들에게 무언가 말하기 시작했다.

    소년이 말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방금보다는 분위기가 더 좋아진 것 같았다. 메이린은 그들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저 소년이 계속 말하도록 두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소년이 말하기를 멈췄다. 직원들도 모두 소년의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소년이 메이린에게 말했다. 메이린이 알아들을 수 있는, 중국어였다.

    “교실을 나오다가 우연히 네가 말하는 것을 들었어. 사정은 선생님들에게 말해 두었어.”

    “여기에 나하고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이 많다는데, 그게 사실이야?”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선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소년을 불렀다. 선생은 한국말로 소년에게 무언가 말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그리고 메이린에게 와서 말했다.

    “내일 다시 여기로 오라고 하셔. 몇 가지 물어볼 것들이 있나 봐.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래. 선생님을 따라가.”

    메이린은 소년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자 소년이 말했다.

    “뭘. 나도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됐어. 난 보란이야. 넌 메이린이라고 했지? 내일 보자!”

    소년은 하나원 건물 밖을 나섰다. 메이린은 내일도 보란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 멀리 선생 하나가 메이린에게 손짓했다. 메이린은 따라갔다. 그곳에서 메이린은 오랜만에 몸을 씻었다. 그리고 깊이 잠들었다.

    *

    소녀는 걷고 또 걸었다. 모래의 색이 변했을 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가 여기에 연꽃이 있다고 말했었다. 소녀는 남자가 말했던 그 연꽃을 찾고 있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이었다.

    마침, 연못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천을 푹 눌러썼다. 그리고 연못이 보이는 방향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소녀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연못이 분명 신기루일 거로 생각했다. 소녀는 고개를 들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발걸음을 믿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도착했다고 착각하는 순간, 소녀는 지쳐서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랬다간 원천강에 갈 수 없을지도, 아니면 훨씬 늦게 도착하게 될지도 몰랐다.

    한참 동안 모래 위로 발자국이 찍히는 것만이 보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발밑에 놓여있는, 촉촉한 진흙의 감촉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흙탕물이 가득한 연못과 빼곡히 자란 연잎들, 그리고 그 가운데 피어있는 연꽃 한 송이가 보였다. 소녀가 고개를 숙이고 물을 마시려고 하자 연못 가운데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물은 마실 수 없다.

    소녀는 연꽃에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연꽃이 말없이 잎을 기울여 소녀에게 이슬을 내어주었다. 이슬을 마시는 소녀에게 연꽃이 말했다.

    이 땅에 찾아온 이유를 말해라.

    소녀는 원천강에 가고 싶다고, 연꽃이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들었노라고 말했다. 그러자 연꽃이 말했다.

    이 땅을 넘으면 검은 모래의 사막이 나오는데 그 사막을 지나 청수바다로 가라. 거기에서 이무기를 만나 바다를 건너 달라고 해라.

    소녀는 진흙 위에 몸을 뉘었다. 지친 소녀는 잠을 청했다. 연꽃이 물가의 연잎으로 소녀에게 그늘을 드리웠다. 연꽃이 소녀에게 말했다.

    나는 봄이 되어도 꽃이 딱 한 송이만 피는데, 어떻게 해야 모든 꽃을 피울 수 있는지 알아봐 줄 수 있겠느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소녀는 다시 한 번 깊이 잠들었다.

    *

    메이린은 잠에서 깨어났다. 평소보다 몸이 가벼웠다. 다리가 아프고, 조금 쑤시는 곳이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메이린은 엄마에 대한 꿈을 꿨다. 꿈속에서, 엄마는 내일 배를 탄다고, 이제 좋은 일만 남았다고 메이린을 달랬다. 메이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엄마 품에서 잠들었다가, 다음 날 일어나 배를 탈 준비를 마쳤다.

    배를 타는 과정은 순조로웠다. 엄마와 메이린은 배를 탔고 배는 조용히 한국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쫓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일하라고 윽박지르는 사장님도 없었다. 바닷바람은 기분이 좋았다. 메이린은 파도를 가르며 나아가는 배 위에서 손을 뻗어 바람을 만졌다. 그리고 엄마에게 보라고, 바람이 정말 좋다고 말했다.

    그런데 엄마가 없었다.

    배 어디에도 엄마는 없었다. 선실에도, 선장실에도 엄마는 없었다. 메이린은 점점 불안해졌다. 배는 한국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배에 탄 누군가가 저기에 한국이 보인다고 소리쳤다.

    꿈에서 깬 건 그 순간이었다. 메이린은 자리에 앉아서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되짚어 보았다. 분명 어제, 몇몇 사람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었다. 지폐, 메모, 하나원… 메이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밖에는 사람들이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메이린은 사람들을 따라갔다. 사람들이 향한 곳은 식당이었다. 메이린은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조금은 특이한 억양의 한국말로 대화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보통의 한국말로 대화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메이린은 엄마가 한국말을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메이린은 엄마가 쓰는 한국어는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일지 상상해 보았다. 북한 억양, 남한 억양, 사투리… 메이린은 그것들의 다른 점을 잘 몰랐지만 덕분에 혼자 밥을 먹으면서도 지루하지 않았다. 메이린은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어딘가로 또 가고 있었다. 메이린은 다시 그들을 따라갔다. 이번에 그들이 향한 곳은 교실이었다. 칠판처럼 보이는 넓은 판이 앞에 있고, 긴 책상과 의자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메이린은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메이린은 제대로 된 학교에 다녀 본 적이 없었다. 쓰는 법과 말하는 법을 배운 것이 고작이었다.

    수업은 한국어로 진행됐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메이린은 수업이 재밌었다. 칠판처럼 보이는 넓은 판에 영상이나 그림이 재생되어서 이따금 무언가 알아낼 수도 있었다. 메이린은 한국에 온다면 얼마든지 학교에 다니고 공부할 수 있을 거랬던 엄마의 말을 떠올렸다. 정말, 교실에는 메이린 또래의 아이들도 많았다. 그들 모두 각자 자신의 교과서와 필기구를 가지고 있었다.

    메이린은 자신도 그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하나원에서 재워주고 밥도 먹여줬으니까 정말 내일부턴 여기서 살면서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울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수업은 몇 시간 정도 이어졌다. 수업이 끝나고, 사람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두리번거리는데, 누군가 메이린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어제 메이린을 방으로 데려다줬던 선생님이 메이린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메이린은 선생님을 따라가는 동안, 많은 것을 생각했다. 어쩌면 나도 여기에서 살아가게 될 지도, 어엿한 한국 사람이 될 지도, 어쩌면… 엄마를 가르쳐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저번에 도와줬던 사람들을 찾아가 한국어로 감사 인사를 드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선생님은 메이린을 상담실이라 쓰여 있는 외딴 방으로 데려왔다. 상담실 안에는 다른 남자가 하나 더 있었고 선생님은 메이린에게 의자를 빼주며 앉으라고 권했다. 메이린이 앉자, 먼저 와서 앉아있던 남자가 말했다.

    “만나서 반갑다. 이름이 뭐니?”

    유창한 중국어였다. 메이린은 간단히 자기소개했다. 남자가 계속 말했다.

    “난 보란의 아빠란다. 옆에 계신 선생님이 통역을 부탁해서 여기 와 있단다. 혹시, 우리 보란 기억하니?”

    메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란의 아버지는 잠시 선생님과 한국어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는 메이린에게 말했다.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너는 하나원에 있을 수 없다고 하시는구나.”

    ‘왜요?’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메이린이 말했다. 보란의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지금 국적이 없는 상태야. 그러니까 한국 사람도, 북한 사람도, 중국 사람도 아니라는 말이야. 하나원은 북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한 곳이야. 그래서 너를 도울 수가 없는 거란다.”

    왜 국적이 없나요? 전 중국에서 왔어요. 메이린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란의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며,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말을 흐렸다. 보란의 아버지가 말했다.

    “한국의 법이 그렇단다. 탈북해서 들어온 사람들은 자신이 북한 사람이거나 혹은 한국에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해. 하지만 지금 너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안계시잖니. 한국에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중국에서도 신원 확인이 안 된다고 하는구나.”

    메이린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더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보란의 아버지가 말했다.

    “만약… 네가 북한 사람이었거나 혹은 한국에 사는 가족을 찾는다면 여기에 계속 있을 수 있겠지만…”

    보란의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메이린은 울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었다. 보란의 아버지는 메이린과 선생님을 번갈아 보았다. 선생님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보란의 아버지는, 선생님을 보며 중국어로 말했다.

    “내가 없었다면, 우리 아들도 같은 처지였을 거요.”

    하나원 선생님이 무슨 말이냐고 묻자, 보란의 아버지가 답했다. 선생님도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어였다.

    “이 아이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

    “저… 제가 같이 살아도 괜찮을까요?”

    보란의 아버지는 메이린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북한에서 외국의 물건들을 사고파는 일을 했다. 그래서 돈이 꽤 많아. 문제없어.”

    차 안은 조용했다. 메이린은 이 상황이 낯설었다.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타는 것도, 가족 외의 사람과 함께 살 게 되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메이린은 말없이 창밖만 보고 있었다. 고속도로도, 건물도, 한국은 깔끔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보란의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 아들도 너와 비슷한 처지란다. 중국인 어머니를 뒀지. 만약 내가 무사히 한국으로 오지 못했다면, 우리 아들도 너처럼 받아들여지지 못했을지도 몰라. 그러니 네가 우리 아들과 좋은 친구가 되어주렴.”

    ‘네’ 메이린은 더 말하지 못했다. 그래도 먹을 걱정, 잘 걱정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곧, 차가 멈추고, 그들은 집에 도착했다. 보란이 메이린을 반겼다. 집은 두 사람이 살기엔 꽤 넓어 보였다. 보란은 슬퍼 보이는 메이린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될 수 있는 대로 가르쳐 줄게. 한국말 읽고 쓰는 법이나, 공부 같은 것들 말이야.”

    보란은 대안학교에 다녔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보란은 학교에 갈 수 없는 메이린에게 자신이 배운 것들을 펼쳐놓고 하나씩 천천히 가르쳐줬다. 한글 쓰는 법, 읽는 법, 말하는 법은 따로 가르쳐 줬다. 가장 먼저 가르쳐 준 것은 한국식 이름이었다. 보란은 자신의 간체자 이름 밑에 한글을 쓰면서 말했다.

    “중국 이름 중에서는 한국 이름하고 비슷한 게 많아. 내 이름을 한국식으로 읽으면 ‘백연’이라고 읽는대. 꽤 그럴듯하지 않아?”

    “그럼 내 이름은 한국식으로 읽으면 어떻게 돼?”

    ‘메이린…메이…린’ 보란이 중얼거리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메이린은 노트에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써서 보란에게 건넸다. 보란은 한자를 보며 확신이 서지 않는 다는 듯이 겨우 말했다.

    “미…림? 미림이 아닐까?”

    미림. 메이린은 자신의 이름을 몇 번 되뇌어 보았다. 메린, 미린, 메림… 미림. 한국의 이름은 중국의 이름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세련되었지만, 익숙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메이린은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메이린이라는 이름은 어쩌면 미림이라는 한국식 이름이 되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닐까, 한국을 생각하며 만들어진 이름이 아닐까 생각했다. 언젠가 메이린이 아니라 미림으로 불릴 거라고, 그렇게 불리게 할 거라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렇게 고민해서 지은 이름이 아닐까 생각했다.

    “미림. 괜찮은 이름 아니야? 앞으로 누가 이름을 물어보면 미림이라고 하면 되겠네.”

    보란, 아니, 백연의 말에 메이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린, 미림… 생각할수록 어딘가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중국인 메이린은 한국사람 미림이었다. 그러나 중국사람 메이린은 한국인 미림일 수 없었다. 그녀는 중국 사람도, 한국 사람도, 북한 사람도 아니었다.

    *

    “오늘부터 책을 읽어 보는 거야. 한국말로. 어때. 할 수 있겠어?”

    “좋아.”

    메이린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보란이 얇은 동화책을 꺼냈다. 메이린은 띄엄띄엄 책의 제목을 읽었다. 오, 늘, 이. 오늘이! 메이린은 보란 듯이 외쳤다.

    “맞아, 오늘이야.”

    보란은 어서 한번 읽어보라고 손짓했다. 그래도 열심히 배우긴 했는지, 메이린은 어렵지 않게 읽었다. 보란은 메이린에게, 한국말로 이야기를 읽은 다음 그 뜻을 설명해보라고 말했다. 메이린은 천천히, 이야기를 읽고 보란에게 설명했다. 내용은 오늘이의 여행을 담은 이야기였다. 어떻게 태어났는지, 부모가 누군지, 아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오늘이라는 아이가 사계절이 모여 있는 원천강에 가서 부모님을 만난다는 이야기. 보란이 말했다.

    “잘 읽었어. 뜻도 거의 맞았고. 이제 조금 더 자연스럽게 말하는 법을 연습하자. 자, 다시 읽어 보자.”

    보란이 재촉했다. 메이린은 소리 내어서 이야기를 다시 읽었다. 이야기를 읽을수록 메이린은 오늘이가 부러워졌다. 메이린 자신도 오늘이처럼 엄마를 찾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메이린은 꿈을 꾸었다. 하얀 모래의 땅을 넘어서, 노란 모래의 땅을 지나 마침내 푸른 물결이 가득한 청수바다에 도착했다. 해변은 넓게 펼쳐져 있고, 모래와 바위만 가득 한데 저 멀리 커다란 뱀이 한 마리 보였다.

    메이린은 뱀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뛰고 싶었지만 너무나도 힘들어서 뛸 수 없었다. 메이린은 포기하지 않고 걸었다. 그리고 뱀에게 다가가 나는 원천강에 사는 우리 엄마와 아빠를 보러 왔다고,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말했다. 메이린의 말을 들은 이무기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노란 눈동자를 메이린의 앞에 가져 대며 말했다.

    “원천강에 가고 싶다면 내 등에 타. 저 섬에 선녀 셋이 살고 있는데 그들을 도와준다면 원천강으로 갈 수 있을 거야.”

    메이린은 알겠다고 답했다. 뱀이 몸을 들어 올려서 메이린이 올라탈 수 있도록 했다. 메이린이 올라타자, 이무기는 바다를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이무기가 말했다.

    “난 여의주가 세 개나 있는데 아직도 승천하지 못하고 있어. 원천강에 가서 어떻게 해야 용이 될 수 있는지 물어줘.”

    기분 좋게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메이린은 손을 뻗어서 바닷바람을 만졌다. 왠지, 메이린의 엄마가 함께 타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메이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메이린이 지나왔던 땅이 벌써 점이 되어 멀어지고 있었다. ‘거의 다 왔어’ 이무기가 말했다. 메이린은 알 수 없는 초조함을 느꼈다. 뭔가 빠진 느낌이었다.

    그 순간, 메이린은 꿈에서 깨어났다.

    *

    참 바쁜 날이었다. 여행이 이렇게나 바쁜 거였다면, 며칠 더 있다가 가자고 해볼 걸 하고, 메이린은 생각했었다.

    엄마는 불안해보였다. 자꾸 주위에 사람들을 확인했다. 메이린은 도로를 지나가는 여러 가지 탈것들을 가리키면서, 저것들을 타고 가면 안 되냐고 말했다. 엄마는 지금부터 부지런히 걸어야만 제시간에 배를 탈 수 있다고 말했다. 차가 쉽게 갈 수 없는 곳에 있어서 차를 타면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도 덧붙였다.

    메이린은 이 여행에 대해서 한국으로 간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엄마는 항상 한국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엄마는 항상 우리는 숨어 지내야만 한다고, 나쁜 군인들이 잡아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메이린, 너와 함께 살기 위해 아빠와 함께 살수 없었다고. 북한 사람인 엄마를 찾으려는 중국군인들 때문에 아빠에게 너무 많은 민폐를 끼쳤다고도 말했다.

    왜 그런지, 메이린은 몰랐다. 여행을 떠나는 그 날도 몰랐다. 하지만 이따금씩 집에 들이닥치는 군인들과 몇 시간 동안 울면서 숨죽이고 숨어있던 시간들을 생각하면 어째선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엄마는 평소보다 더 불안해 보였고 메이린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그 상태로, 메이린과 엄마는 오래 걸었다. 항구까지는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걸어야 했다.

    메이린은, 걷는 내내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숨죽인 채로 걷기만 하는 엄마의 모습이 무섭다고 생각했다. 메이린은 끌려가다시피 걸었다. 꽉 잡은 손도, 계속 걸어서 다리도 아팠다. 불편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엄마가 무서워서 그럴 수 없었다.

    아침이라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공기는 서늘했고, 맑았다. 안개도 조금 끼어 있었다. 메이린은, 엄마가 걱정하는 일은 어쩌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엄마는 불안해 보이는 얼굴로 계속 걸었다. 걸을수록 점점 더 시골 같은 풍경이 되어갔다. 그나마 보이던 사람들도 더 줄어들었다. 하지만 엄마의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눈을 부릅뜬 채로, 엄마는 멈추지 않았다.

    엄마와 메이린은 곧 컨테이너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골목에 들어섰다.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메이린은 엄마의 눈동자에서 안도감을 보았다. 메이린과 엄마는 부두에 도착했고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과 만났다. 메이린과 엄마가 타고 갈 배는, 작은 고깃배였다. 밀항, 돈… 엄마와 배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하는 말들이 귓가에서 웅얼거렸다.

    메이린은 엄마에게, 다리가 아프다고, 먼저 들어가 있으면 안 되냐고 물었다. 그 때, 저 멀리에서 군복을 입은 사람 둘이 배 쪽으로 걸어왔다. 메이린은 그들을 보지 못했고, 엄마는 메이린에게 그러면 그렇게 하라고 말하며 선장 아저씨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아저씨들이 서둘러 배에 올라탔다. 출항하려는 듯, 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메이린은 선실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마는 메이린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고,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이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곧, 항구가 멀어졌다. 항구에는 아직 엄마가 남아있었다. 한참 뒤, 한국 땅에 버려지듯 내몰린 메이린이 선원 아저씨에게 들은 것은 ‘엄마를 기다리지 마라’는 말 한마디 뿐 이었다.

    *

    “한국에서 살고 싶지 않니?”

    “하지만 전 한국에 가족도 없고, 엄마도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걸요.”

    “내가 도와줄 수도 있는데. 한국에서 살 수 있게.”

    하지만 전 지금도 좋아요. 메이린은 나지막이 말했다. 어째선지 입 밖으로 내기 어려웠다.

    “하하. 승호 아저씨는 좋은 분이란다. 나와 보란이도 많은 도움을 받았어.”

    보란의 아버지가 말하며 메이린과 보란에게 명함을 한 장씩 건넸다.

    “한국에 대해서 궁금한게 있거나, 혹은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하시더구나. 승호씨는 너희 같은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단다.”

    *

    메이린이 몇 달 동안 해왔던 생각을 보란에게 말 해주었을 때, 보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메이린의 예상과는 아주 다른 반응이었다. 메이린은 보란이 말리거나, 슬퍼하면서 겨우 수긍하거나 아니면 한 번 즈음 더 물어보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보란은 생각보다 차분했고 메이린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서운하지 않아?”

    보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보란이 말했다.

    “나도 가끔 엄마가 보고 싶은걸.”

    메이린은 이제껏 보란의 어머니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 궁금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보란과 이정 아저씨의 집에 온 지 한 달 쯤 되었을 때, 메이린은 어머니는 어디에 계시냐고 조심스레 물어봤었다. 그러나 보란은 다음에 말해주겠다고 말하며 대답을 미뤘다. 그러고선 몇 달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메이린은 더 묻지 않았다. 단지, 메이린은 그 때부터, 보란도 자신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보란은 이제 분명 한국 사람이었고, 집이 있었고, 가족이 있었다. 그러나 보란도 한국말이 어눌했고 중국어가 더 편했으며 엄마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것들이 국적이나 집보다 더 중요했다. 적어도 메이린과 보란에게는 그랬다.

    “우리 어머닌 돌아가셨어. 우리 아버지를 숨겨주려다가.”

    보란의 손에는 <오늘이>가 들려있었다. 보란은 책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중국군인들이었어. 어떻게 죽었는지는 몰라. 숨어있었거든. 큰 소리가 나고, 군인들의 발소리가 들렸어. 밖으로 나갔을 땐 이미 늦어있었고.”

    보란이 메이린에게 책을 건넸다. 보란이 말했다.

    “그런데 학교에 가니까, 애들이 다 나보고 중국사람 아니냐고 하더라.”

    메이린은 보란의 얼굴에서 복잡한 무언가를 느꼈다. 보란은, 슬퍼하는 것 같았고, 화내는 것도 같았고, 답답해하는 것도 같았고…무언가 체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보란은 한숨을 내쉬고 메이린에게 말했다.

    “만약 언젠가 집을 떠나게 된다면, 내가 정말로 한국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알아봐 줄 수 있을까?”

    *

    메이린은 짐을 꾸렸다. 보란도, 그의 아버지도 아직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메이린은 조심스레 집을 나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는 짐도 넉넉했고, 돈도 조금 더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이 떠나기 가장 좋을 때였다. 더 이곳에 남아있다간 짐이 될 뿐이었다.

    문을 나서면서, 메이린은 책상 위에 올려 둔 쪽지에 대해 생각했다. 한국어 솜씨가 조금 더 좋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엉성하나마 한국말로 쓰기 잘한 것 같았다. 중국어로도 쓸까 생각도 했지만… 역시 배운 걸 보여주는 편이 더 좋아 보였다.

    메이린은 언젠가 보란에게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엄마를 찾아서, 한국 사람 혹은 중국 사람이 되어서, 그도 아니면 북한 사람이라도 되어서 보란을 만나러 와야지. 비싼 선물도 사 들고 와야지. 메이린은 배낭을 짊어진 채 걸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헤어지자니 조금은 슬펐다.

    언젠가 꼭 돌아와야지. 메이린은 몇 번이고 다짐했다. 뿌옇게,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가 벌써 오래전이었다. 메이린은 자신이 거리를 방황했던 때를 떠올려보았다. 간판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랐는데 참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이린은 계속 걸었다. 메이린은 엄마를 찾고 싶었다. 엄마를 찾아서,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메이린은 보란과 그의 아버지 이정 아저씨가 해줬던 말을 생각해냈다. 메이린은 이정 아저씨가 줬던 명함 한 장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명함 뒤에는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메이린은 천천히, 느릿느릿 한국말을 읽어냈다. 약도에 찍힌 글자에 따르면 승호라는 분은 서울에 어느 신문사에 있는 것 같았다. 메이린은 우선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역에서 노선도를 보고, 약도에 적혀있는 지하철역을 찾아냈다. 그런 다음 다시 노선도를 천천히 읽어가면서 어디에서 어떻게 지하철을 타야 하는지 생각했다.

    환승역, 호선의 숫자… 메이린의 머릿속에 길이 그려졌다. 메이린은 무인 발권기로 가서 표를 샀다. 지하철을 기다리고, 역으로 들어온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아침 일찍 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메이린은 자리에 앉아서, 지하철 안내 방송에 귀를 열어둔 채로 꾸벅꾸벅 졸았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그런가, 피곤했다. 지하철 안내방송 음악과, 중국어와 한국어가 번갈아 가며 들렸다.

    도트

    윤채연

     

     

     

    꿈과 미래의 도시, 도트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도트에는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들과 준수사항은 모두 이 안내 책자에 적혀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책자의 규칙을 준수해 주시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나 붉은 지붕 388번지를 찾아오세요. 도트의 주민이 된 여러분을 진심으로…

     

      책자를 덮었다. 푸른 배경에서 웃고 있는 삼인 가족의 모습이 그려진 얇은 책자의 환영 문구는 이상하게 끊겨있었고 어쩐지 조금 찝찝해져서 책자의 뾰족한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기묘할 정도로 정사각형인 창문 밖에서 가지런한 길거리가 자꾸만 깜박거렸다. 사실 깜빡거리는 것은 거대한 가로등이었으나 주변은 어두웠고 길거리는 밝히는 가로등은 그것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가로등의 불이 꺼졌다가 다시 켜질 때마다 고요한 길거리는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리가 잠깐씩 밝아질 때마다 123-5번지라고 적힌 초록색 푯말이 반들거렸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꽤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정을 붙일 수는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며 어깨에 두른 담요를 여몄다. 어쩐지 날이 점점 추워지는 것 같다. 벌써 겨울이 된 건가. 거실 벽 어귀에 걸려있을 달력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으나 달력이 있었던 것 같은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쌀쌀한 밤공기에서는 공업용 무언가가 섞인 것 같이 지독한 냄새가 났다. 아직 어딘가의 공사가 덜 끝난 모양이었다. 도트의 고요한 거리는 밤새 계속해서 점멸했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1. 123-5번지 주택 앞 가로등이 꺼지면 그다음 날 정오에 관리인을 찾아가세요.

     

     

      거기 누구 있습니까. 가로등이 고장 나서 찾아왔는데. 마을의 끝자락 붉은 지붕만큼 붉은 대문을 가진 388번지의 초인종을 누르며 관리인을 불렀다.

      안녕하세요. 도트에서 편안한 시간 보내고 계신가요? 도로 관련 불편 신고 접수했습니다. 가로등은 오늘 자정이 되기 전에 수리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푸른 유니폼을 입고 그린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관리인은 매뉴얼을 그대로 읊듯 말을 뱉어내더니 더 할 말이 있냐는 양 새카만 눈동자를 하고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조금 뻘쭘하기도 한데다 어쩐지 식은땀이 나서, 아, 예. 알겠습니다, 하고는 문을 닫고 나왔다.

      서서히 닫히는 붉은 문 사이로 더운 공기가 훅 풍겼다. 그것은 난방을 아주 오래 돌렸을 때나 나는 묵직하게 달구어진 답답한 공기였는데, 조금 과한 것 같은 온기에 의아하면서도 저 관리인이 추위를 잘 타는가보다 여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정원에 깔린 흰 자갈이 햇빛을 받아 더 허옇게 빛났다. 개미가 기어 다니는 듯 간지러운 손끝을 매만졌다.

      어쩐지 기묘한 곳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되었더라. 아주 근본적인, 그러나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만 같은 질문을 던지며 주황색 보도블록 길을 걸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똑같은 흰 지붕의 주택들이 끝없이 늘어져 있었다. 정수리에 닿는 햇볕은 조금 따가웠고 발바닥 어딘가는 자꾸만 근지러웠다.

      아무튼 도트는 꿈과 미래의 도시. 이곳에 올 수 있어 행복하다.

     

     

    2. 도트의 주민들은 언제나 친절해야 합니다. 입가에 미소를 잃지 마세요. 웃지 않는 주민은 도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3. 도트 시내의 플럼지 바에서는 당신의 이웃을 사귈 수 있습니다. 오아시스의 노래가 나올 때는 잭 콕을 마시지 마십시오.

     

     

      어제는 참 재밌었죠. 그곳에서 말이에요. 나는 햇빛에 반짝이는 얇은 갈색 머리카락과 흔한 고동색 눈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그의 낯선 향수 냄새와 입안에서 맴도는 알코올의 향과 비틀스의 옛 노래, 끈적거리는바 테이블 그리고 어둑한 조명이 인식되었다. 아, 여기는 도트의 유흥시설 중 하나인 시내의 플럼지 바였다. 나는 어린 시절 먹었던 끈적끈적한 물약 같은 잭 콕을 삼키며 짙은 눈썹과 커다란 코, 각진 턱을 가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는 낯선 이에게 약간의 두려움과 혼란을 느끼며 물었다. 도대체 그곳은 어디고 당신은 누굽니까? 날 아세요? 그는 과장되게 어깨를 들썩이며 대답했다.

      어제도 소개했지만, 저는 미스터 D고 그곳은 그곳이죠.

      미스터 D는 이상한 것을 묻는다는 양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손을 들어 바텐더에게 보드카 한잔을 부탁했다. 나는 미스터 D가 이 넓고 넓은 도트의 주민이겠거니 생각했다.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나는 별 웃긴 주문을 하는 미스터 D의 말을 흘려들으며 플럼지 바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여느 오래되고 분위기 있는 술집과 같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소품들을 전시해 두었는데 두꺼운 텔레비전이나 낡은 인형, 찢어진 책 같은 것들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정말 그 시대의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깔끔했기에 그 자체로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어디서 만났나요, 나는 우리가 분명 만나지 않았을 것이란 확신을 두고 물었다. 미스터 D는 눈에 띄고 기억에 남을만한 미남이었고 그저 잡담과 같은 질문이었으나 미스터 D는 그것을 벌써 잊어버렸다는 양 언짢다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벌써 저를 잊어버렸다니 아쉽네요.

      나는 미스터 D에게 우리가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조금 더 물어볼까 생각했으나 모호하게 대답을 회피하는 것 같은 그의 태도에 나도 딱히 캐묻고 싶지는 않아서, 그리고 어쩌면 미스터 D 또한 착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어깨를 으쓱하고는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묘하게 어긋나는 것 같은 기억에 다시 쌉싸래한 술을 넘겼다. 바 한쪽 구석의 낡은 에어컨은 꺼져 있었으나 서늘한 공기는 자꾸만 목덜미에 닿아서 나는 마침 보드카 마티니 한 잔을 내오는 바텐더에게 어디 창문이 열려있느냐고 물었다.

      창문은 늘 열려있죠.

      그렇지만 지금은 겨울인데 창을 열어놓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나는 이제 추위에 소름이 돋은 팔뚝을 만지작거리며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고 옆에 앉은 미스터 D는 커다란 소리로 웃었다.

      겨울이라뇨! 여전히 웃기는 사람이네.

      나는 갑자기 발작이라도 하듯 웃는 미스터 D를 보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은 겨울이 아니라는 걸까, 그렇지만 지금은 겨울인데. 이제 바텐더까지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고 느릿하게 흘러나오던 비틀스의 노래는 어느 순간 끝나고 Live Forever가 흘러나왔다. 나는 나머지 한 모금의 잭 콕을 삼켰다. 추위에 코가 막힌 듯 답답해져왔다.

     

     

    4. 성당에서는 일요일마다 무화과 케이크를 구워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달의 네 번째 일요일에는 성당이 열지 않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5. 마을에 보라색 지붕의 집을 발견한다면 즉시 관리소에 신고해 주십시오. 도트의 집은 모두 흰색이거나 붉은색의 지붕을 가지고 있습니다.

    6. 유모차에 고양이를 태운 노파가 도서관을 찾는다면 수영장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십시오. 도트에는 19~49세의 주민들만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집에 도착하여 달력을 찾는다. 술이 들어가 가누기 힘든 몸이 점점 떨려왔다. 낮에는 이렇게 춥지 않았던 것 같은데 갑자기 한파가 몰아치는 것이 분명했다. 지저분한 책상 위를 둘러보았으나 늘 그곳에 있었던 탁상 달력은 보이지 않고, 냉장고 옆에 걸어놓은 커다란 달력도 온데간데없었다. 책상 서랍에서 안내 책자를 다시 꺼내어 난방과 관련된 주의, 안내사항을 훑었다. 긴 책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읽어내렸다. 따끔따끔한 목구멍으로 축축한 침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책자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아, 이제야 알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있는 이 도시의 이름은… 도트.

      꿈과 미래의… 도시….

     

    *인터넷 괴담 '공포의 나폴리탄(恐怖のナポリタン)' 마지막 부분의 형식을 이용하여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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